정도전과 그의 시대

조선 건국의 사상적 아버지라 불리우는 정도전에 대해 알기 위해 책을 골랐다. 한권은 이덕일 선생님이 쓴 '정도전과 그의 시대', 그리고 다른 한권은 김용옥 선생님의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다. 이 중, '정도전과 그의 시대'를 먼저 읽기 시작했다.

첫 느낌은 '고려는 정말 망할 지경까지 갔구나, 그리고 소수의 세력이 잘 먹고 잘 살자고 새로운 나라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구나' 였다.  당황스럽게도고려말의 시대상이 젊은 이들이 헬조선이라 부르는 현재의 시대상과 많은 부분 겹쳐보였다. 기득권이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니, 과거에는 왕조를 바꾸는 혁명이 일어났던 것 아닌가? 선거를 통해 집권당을 바꾸고, 대통령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정치인들 스스로가 혁신의 주체를 자처하지만 혁신의 대상이다보니 혁신에 큰 한계가 있다.




책 속으로 들어가 고려말로 가보자. 고려말에는 권문세족이라고 불리우는 세력가들이 있었는데, 산천을 경계로 토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덕일 선생님은 이를 비유해 지금의 서울이라 하더라도 한두 가문이 그 땅을 나눠 갖을 만큼이라고 비유했다. 그 시절에 광공업이래야 그릇, 가구, 농기구 등 만드는 정도였을 것이고, 농사가 전부였을터이니, 땅은 삶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권문세족들은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토지를 소유했고, 도평의사사라는 정치기구를 통해 왕 위에 굴림하고 있었으니, 그들은 떵떵거리고 살았겠지만, 그 외의 대다수 백성들의 삶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오로지 어린아이부터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온 가족이 피땀으로 농사를 지어 놓고 나면, 소출의 8~9할을 힘있는 놈들이 와서 세금으로 빼앗아갔다고 하니, 억울하고 분통한 마음에 농사를 하기 싫었을 것이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적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된 신돈의 이야기~. 신돈의 어머니는 경상도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의 여종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유로 승려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신돈은 공민왕과 힘을 합해, 강력한 개혁정책을 폈다고 하는데,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서울, 즉 개경은 15일, 지방은 40일 이내에 스스로 알아서 돌려주라. 돌려주는 자는 불문에 부치겠지만, 기한을 넘겨 발각되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겠다"라고 했다고 한다. 권세가들이 땅을 돌려주고, 천민이 양민으로 환원되니, 백성들로부터 '성인'인라고 불렸다고 한다. 권문세족은 죽어라 신돈을 싫어했을 것이고, 신흥사대부와 공민왕은 '신돈'이 혼자 성인으로까지 불리게되니 견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돈이 쫓겨나고 사형까지 당하게 됨으로써, 공민왕의 개혁정치 6년이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 중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예; 고려말 우왕,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 등), 신돈을 쫓아내고 죽인 세력들이 만들어낸 것도 상당부분 있을 것이고,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세울 논리를 만들기 위해 지어내진 것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배운것이 많아 옳고 그름을 크게 생각할 수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부정해야 하는 신진사대부들이 혁신을 꾀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덕일 선생님에 따르면, 정도전의 인생은 크게 네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시기는 벼슬에 나왔다가 유배형에 처해진 시기, 두번째는 유배시기, 세번째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만난 이후 1392년 조선개창까지의 10년, 네번째는 개국 후 북벌을 꿈꾸다 이방원에게 살해되되기까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한다.

혁명을 모의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부분이 짜릿할 수도 있겠지만, 정도전의 인생을 바꾼 것은 바로 두 번째 시기인 유배 시기라 하겠다. 9 년의 유배, 긴긴 시간동안 정도전은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한다. 잠시 귀양온 지식인내지 세력가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면서 측은지심을 갖은 정도가 아니라, 소작농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한다. 대표적으로 계구수전, 계민수전처럼 모든 토지를 몰수해서 공전으로 만든 다음, 백성 수를 계산하여 공평하게 나누어주겠다는 생각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1383년 가을, 이성계와 정도전이 만남을 갖고, 의기투합한지 딱 10년만에 조선이 건국을 하게 되었으니,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면 이 만남을 띄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통령이든 재벌총수이든 한 조직의 리더는 독불장군과도 같이 혼자서 결정하고 명령하는 유형으로 비치어진다. 망한 경우에는 욕하지만, 일단 성장하고 커나갈 때에는 주위에서 모두 치켜세워주기 바쁘다. 하지만, 참모를 띄워주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이성계는 무장이었지만,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정도전의 가치를 알아보고 역사를 함께 했으니 뛰어난 리더쉽과 포용력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심지어 이성계는 무장으로, 먹고 사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부자였지만, 정도전이 갖고 있는 혁명적 사상에 공감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으니 이성계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는 욕심많은 똥별은 아니었다.

정도전이 설계한 과전법에서는 벼슬아치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수조권을 주었다고 하는데, 관직수행의 대가로 해당 과전 수확량의 10분의 1을 조로 걷고, 이렇게 받은 곡시 중 10분의 1을 국가에 세로 내도록 했다고 한다. 심지어 흉년에는 조를 감해주고, 수확이 아주 좋지 않을 때에는 조를 아예 면제해주었다고 한다. 권문세가들이 다시 욕심을 부릴 것을 대비하여, '전주가 전객의 소경전을 빼앗은 것이 1부에서 5부에 이르면 태 20대에 처하고, 매 5부마다 1등을 더한다. 죄가 장 80대에 이르더라도 직첩은 빼앗지 않지만, 1결 이상일 때에는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준다.'와 같이 경작권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적 제도도 만들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정도전은 다양한 가능성을 감안해서 치밀하게 법을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경제는 소수 재벌 중심의 경제체계이고,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에 따라 경제편중도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정경유착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져 있을만큼, 친재벌 정책이 만들어지고 이는 다시 재벌의 힘을 키워준다. 부의 분배에 있어서도 우리 사회는 취약하다. 부의 불균형이 당대에서 다음 세대로 대물림까지 되고 있어, 금수저라는 비아냥과 흙수저라는 자조가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경제 성장은 제자리 걸음이고, 국가와 개인의 빚은 늘어만 간다.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아이낳기도 집갖기도 친구사귀기도 포기하고 지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이제는 중국, 동남아 국가에서 온 해외인력들과도 싸워야 할 판이다. 대통령보다 더 힘이 쎄다는 웃지 못한 실세 이야기도 신문을 도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려말의 시대상황과 지금 우리시대가 많이 겹쳐진다. 일제로부터의 핍박에서 해방되고, 남북한간의 전쟁 후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나라가 불과 50-60년만에 놀랄만큼 발전도 했지만, 무리한 압축성장에 감추어지고 무시해왔던 문제들이 이제 가장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우리시대의 이성계와 정도전을 기다린다고 하면 불순하다고들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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