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9월 초 모 고객사 경영진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인사말 나누는 것은 잠깐이었고, 양쪽 대장의 역사 battle로 시작해서 한의학 battle로 마무리가 된 일이 있었다. 양사 대장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계시니, 양 옆에 앉은 사람들은 그저 가만히 듣기만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 듯 마는 듯, 술잔도 부딪히지 않고 가만히 건배를 했었다. (깜짝 놀란 것은화제가 금새 바뀌겠거니 했는데 근 3시간 정도 역사 이야기에 계속 집중되더라는 것이다.)

자리를 파하고 나와서, 맥주 한 잔 하러 모였는데, 이구동성으로 '양쪽의 대장들이 이렇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다', '속성반으로 역사공부를 하든지 해야겠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주말에 뒹굴거리다 교보문고에 들어가보니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이 베스트셀러 1위에 있기에 주문을 했다. 양쪽 대장님의 역사배틀도 혹시 내가 모르는 요즘 유행인가?

근래에 준비 및 배송이 지연되는 교보문고 덕분에, 주문을 했었는지조차 다 잊어버린 시점에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젊은 친구가 재미있게 역사 강의를 한다고는 하는데, (집에 TV도 없는터라 얼마나 말재주가 뛰어난지는 모르겠고,) 기대를 안고 책을 펴보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부터 27대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27분의 왕별로 Chapter가 구성되어 있다. 80년대 초반 고등학교에서 쓰이던 상하권의 국사책에서, 조선시대만 발라내면 하권에서 2/3 정도 차지 했었던가? 이에 비하면 분량상으로 두툼하기는 하다.

그 시작은  태조 이성계~ 

고려말 무장으로서 여진족과 왜구를 무찌르고, 실력자로 떠오른 장수로 원명교체기라는 국제적 정세의 변화속에, 역성혁명에 성공한 고려의 마지막 왕이자, 조선의 1대 왕.  (드라마인지 영화를 통해 얻게 된 이미지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장이기에 책을 가까이 하지는 않아 듣기 좋은 말을 번드래하게 하는 재주는 없으나, 얻을 것 없는 명분을 앞세우기 보다는 진정으로 백성과 병사의 삶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허수아비 왕(=고려 우왕, 창왕, 공양왕)보다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리더쉽을 인정받았던 실질적인 왕. 물론 킹 메이커 역할을 한 정도전과 같은 충신이자 친구를 비롯해서, 목숨걸고 함께 싸운 가족(아들들,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역성혁명도 가능했으리라.

조선 왕조가 500년을 버틴 상당한 공은 정도전에 있다고들 한다.  한명의 왕의 자질과 실력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신하들이 나라를 운영하는 일을 하도록 하고, 왕은 그 자질이 어떠하든 근면하게 공부하고 신하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왕권을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다시 왕권을 제한하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반복되었지만, 초기 설계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역사 battle의 시작은 바로 정도전이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가 정권을 잡았지만, 정도전이 없었다만 불가능한 이야기이고, 특히나 조선이 500년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기본을 설계했다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을 이성계가 아닌 정도전으로 보고자 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에 별로 없다. 고등학교 역사 책에 나오듯이 왕의 순서를 외우고, 각 왕의 시대에 어떤 중요 사건이 있었고, 어떤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지 정도를 재미있게 외우기 좋게 해주고 있다고나 할까? 

대학입학 시험 이후, 우리 역사 공부는 별도로 해본 일이 없지만, 책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하나하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앗 이건 뭐지?

세종대왕. 세종 뒤에 대왕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그 만큼 업적도 많았고, 우리도 다른 왕은 몰라도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상당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세종대왕의 업적과 에피소드가 있다. 나만 그런가?

a) 노비에게 100일의 출산휴가를 주다. (관노비의 출산휴가는 7일 정도였다는데, 출산 전에도 복무를 면제해주도록 했다고 하네요.)
b) 남자 노비에게도 30일의 출산휴가를 주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깜놀, 감동이네요.)

새로 알게 된 이야기거리로는 세종대왕님이  육식을 즐시셨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만 보더라도 기골이 장대한 무인이었을 것이고, 아버지인 태종(=이방원)의 경우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했던 문무를 겸비한 수재라고 하니, 기골 장대하셨을 것 같은데, 매일같이 육식을 즐시셨다 한다. 심지어 태종이 임종을 하면서도 세종의 건강을 걱정하여, 상중인 기간에도 육식을 계속 하도록 당부했다고 하니....

이렇게 한 분, 한 분, 짧게는 수년에도 길게는 몇 십년의 재위기간을 넘기고 넘기다 보면 조선시대의 마지막에 이르게 된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뭐라고 할까? 조선시대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짧은 시간에 훓어보기에는 좋은데, 너무 수험생에 촛점을 맞춘 느낌이라고나 할까? 누구누구 왕 시대에 어떤 어떤 일이 있었는지의 연대기를 순서대로 머리속에 정렬하게 좋게끔 기획된 서적같은 느낌이 든다. 반면에 장점으로는 너무 Fact 중심으로 Dry 하게 쓰여진 국사책들과는 달리 분명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책 말미에 각 시대를 그린 드라마와 영화들의 리스트를 보는데, 얼마 전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KBS에서도 역사드라마를 포기한다는 기사가 겹쳐져보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책을 덮지만..., 그냥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랜덤하게 펴보게 될 것 같다.

이 책을 주문하게 만든 역사 battle이 생각나서라도 쭉 역사 공부를 이어가 보련다. 먼저 정도전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수원 화성은 책도 읽고 찾아가 직접 보고 느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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