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물건 - 내 물건은?
10년전, 그러니까 2004년 6월에 "윤광준의 생활명품 산책"을 읽었었다. (언제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할 비상한 머리는 없으나, 당시에 하던 네이버 블로그에 끄적여둔 글이 있어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당시 책의 말머리에 있던 문구가 가슴에 다가와 옮겨두었었는데, 다음과 같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산책 (Jun. 4, 2004) - 네이버 블로그
꾸럭의 생활명품 산책 - 첫번째 이야기 (Jun. 5, 2004) - 네이버 블로그
꾸럭의 생활명품 산책 - 두번째 이야기 (Jun. 10, 2004) - 네이버 블로그
물건에도 격이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최고급 물건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렵게 알아가는 내밀한 즐거움을 모른다.
격이 있는 물건에 도달하기까지 겪는 수많은 일들,
그것이 내 삶의 내용이고 역사가 된다.
(출처: 윤광준의 생활명품 산책)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4년 김정운 교수의 "남자의 물건"을 읽었다. (책 읽다 알게 되었지만, 김정운 교수랑 윤광준 사진작가는 절친이다. 유유상종이라고,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이 또한 몰랐는데, 책 표지에 쓰여진 남자의 물건이라는 글씨는 신영복 선생님께서 쓰신 것이라고 한다.) 책 말머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 이야기가 풍요로워야 행복한 존재다.
할 이야기가 많아야 불안하지 않다.
한국 남자들의 존재불안은 할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정치인 욕하기가 전부다.
사회적 지위가 그럴듯할 때는 그래도 버틸 만하다.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되는 몇 가지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는 순간 그 이야기도 끝이다.
남자가 나이 들수록 불안하고 힘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도무지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의 물건'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10명의 명사들이 소개하는 자기의 '물건' 이야기가 담겨 있다. 흥미진진한 '물건' 이야기를 읽기 위해서는, 책의 전반부 즉, 김정운 교수가 진단하는 우리 남자들, 아저씨들의 문제를 읽어줘야 한다. 건너뛰고 읽어줄 수도 있지만, 읽다가 혼자서 많이 웃었다. 책 읽으면서, 이렇게 자주 웃어본 것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만화책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하나 사진 하나 없어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김 교수의 유머감각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술 자리에서 술도 한잔, 안주도 한입 먹어가면서, 옆 사람에게 툭툭 던지는 그런 투의 문장에, 주제도 자주 바꾸어주니 지겨울 틈이 없어서일 것이다.
eBook의 형광펜으로 찍찍 그어놓은 구절도 많았다. 하지만, 다시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어렸을 때에는 읽은 책도 또 읽고, 또 읽어가면서도 즐거워했는데, 나이들면서부터는 다시 읽어야지 라고 마음 먹고도 다시 읽어본 책들이 거의 없다.)
골고루 다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만 꼽아보라면 신영복 선생님의 벼루,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문재인의 바둑판을 꼽고 싶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오랜기간 있었던 것으로 추정컨데, 많은 분들이 이미 읽으셨겠지만, 이 책을 처음 읽게 되실 분들을 위해 초치는 일은 하지 않으련다.)
10년 전 2004년에 PDA를 가지고 "윤광준의 생활명품"을 읽고, 10년후 2014년 iPad를 가지고 "남자의 물건"을 읽은 시점에서, "나의 물건"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지난 주에는 머리털나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Thankgiving Day를 맞았다. Black Friday니 Cyber Monday이니 해서, 한국에서 직구로 뭔가를 사겠다고들 다들 들썩인다. 옆에서 와이프도 나에게 뭐 살 것 없냐고 묻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 없다. 견물생심이라고 뭔가 보면 사고 싶은 것이 생기겠지 싶어서, Amazon도 뒤지고, 의류업체 Site도 뒤져보고 했다. 그런데도 없다. 남들은 사고 싶어도 못사서 안달인데,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맞았는데 왜 사고 싶은게 이렇게 없을까?
무소유의 고상한 정신세계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니고, 안빈낙도를 삶의 가치로 가진 것도 아닌데, ... 잠시나마 내가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것은, 1) 문방사우(만년필, 볼펜, 샤프, 연필, 공책, 메모지 등), 2) Cuffs Button (폼생폼사로 살지도 않았는데 왜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3) 봉제인형이 전부였던 것 같다.
1) 문방사우는 좋아하지만, 몽블랑 만년필이 생기고 난 이후부터는 그 열정이 팍 식었다. 이후에도 좋은 볼펜, 만년필을 몇 자루 더 구하기는 했지만, 정말 갖고 싶어할 때의 그 설레임이 좋은 것이지, 정작 갖고 나면 허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유가 아니라 향유가 핵심인데,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채 물욕만이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석해본다.
2) 한때 드레스셔츠는 고급으로 입거나, 맞춤형으로 입으면서, 셔츠가 하나 생길 때마다 Cuffs Button을 하나씩 사모으고, 해외여행이라도 가면 또 하나씩 장만하고는 했는데, 어느순간부터는 옷에 대한 관심도 없다. 옷걸이가 받쳐주지 않으니, 아무리 잘 입은들 폼도 살지 않을 것이고, 잘 입고 다닌다고 꼬실 여자도 없다(아니 관심을 보일 여자도 없고가 맞겠다)는 깨달음이 나를 바꾼 것 같기도 하다.
3) 봉제완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지만, 이전같지는 않다. 총각시절부터 해외여행을 가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내지 않은) 그 나라, 그 장소에서만 구할 수 있는 조금 특이해보이는 완구를 구해서 소장하고 살았었는데,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 아이들이 물어뜯고, 인형에 해꼬지를 하면서부터 수집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종이책이라도 사서, 책꽃이에 쌓아가면서 뿌듯해하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아이들 책에 밀려 박스에 담기다가, 언젠가부터는 eBook을 먼저 사는 형태로 바뀌다보니, 책들을 베개 삼는 것도 안되고, 책들을 컵라면 받침으로도 못쓰고, 눅눅한 책냄새 속에 빠져들수도 없다.
'물건' 이야기를 하면, 힘이 불끈불끈 나고, 얼굴에 웃음이 번져야 하는데, '나의 물건'은 30대에서 40대로 오면서 영 힘이 없다. 딱 하나 '나의 물건' 이야기로 남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면, San Diego에서 생활하면서, (야외캠프 가서 닥치는대로 적응하듯이) 매일 아이들 반찬이나 음식 만들어주면서 사용하고 있는 무딘 칼 한자루이다. 이것으로 감자도 깎고, 양파도 깎고, 두부도 자르고, ... 거의 모든 것을 다한다. 이 칼 한자루가 나에게는 소중한 이야기 거리가 되줄 수 있을 것 같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온갖 종류의 반찬부터 나름 어려운 음식도 만들어가고 있는데,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서 이런 시간을 보낸 것도 처음이고, 앞으로 이런 기회가 올지, 또 내가 또는 아이들이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이 칼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해도, 미국에서 함께 한 일년여의 시간과 경험은 기억해줄 것 같다. 나중에 이 녀석들이 커서 시집, 장가 가고 나서, 언젠가 한번 쯤은 그 녀석들의 남편, 부인이 집에 왔을 때에 이 칼로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다.
오늘이 Cyber Monday 세일 마지막이라는 Amazon mail을 받았는데, 오늘 저녁에 다시 두리번 거려 보아야 겠다. 그리고 내가 쉽게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내 욕망 속의 물건은 무엇인지 찾아보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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